#0 만 9년하고 3개월, 개발질을 했다. 꼬박 십년차 개발자인데, 아직껏 잘 하는 전문분야도 하나 없고, 그저 시키는 거 만들고 재밌어 보이는 거 조금씩 뒤적거리며 대-충 살았구나 싶다. 부끄럽고 한심하기 이를데 없다. 이 나이 먹은 초보 개발자 받아줄 회사도 없고, 그렇다고 매니저 경력이 제대로 박힌 것도 아니니 어디 가서 관리자 노릇 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1 첫 회사에선 C와 PHP를 했었다. UNIX Network Programming 책 예제 수준을 별로 넘지 못하는 수준의 서버 코드를 지금 생각해보면 참 담도 컸구나- 싶다. 그래도 메일 서버 다뤘다고, MIME 관련된 것들은 요즘도 쏠쏠하게 도움이 되긴 한다. sendmail 코드 분석했던 것도 좋은 공부였었고, LAMP 환경에 익숙해진 것도 괜찮은 소득이었다. 물론 지금 와서 PHP가지고 뭐 하라면 일단 고민부터 해야될 일인게, 그 시절 싸이트 만들던 스킬로 요즘 무슨 사이트 만들겠다고 덤비면 아마 개박살이 날 게다.
#2 두번째 회사에선 와이브로 관련된 일들을 했다. 802.16e 스펙 문서의 불친절한 설명에 나 자신의 이해력의 한계를 느끼고 머리카락을 쥐어 뜯던 밤들이 제일 많이 생각난다. EAP(정확히는 EAP-PSK와 EAP-AKA) 구현이 본업이었는데 꽤 재미있었다. 임베디드 어플리케이션 개발자 흉내도 좀 냈었다. Embedded Linux 관련한 용역 작업도 간단하나마 두어개 했고, (그 와중에 GTK 코딩도 좀 해봤고) Qt 코딩도 해 볼 수 있었고, WinCE용 어플리케이션 개발도 EVC 일주일 교육 받은 가락으로 깨작거려 보기도 했다. SIP UA도 사이 사이 했었는데 왜 했는진 기억이 안난다. 아무튼, 커널 포팅이나, 빡센 최적화 작업 같은 본격적인 임베디드 개발자들이나 하는 일들은 못 건드려봤으니, 감히 어디 가서 임베디드 좀 해봤다는 이야긴 못 꺼낸다.
#3 지금 다니는 회사는 세번째 회사다. X-Internet 제품 서버 파트를 맡아서 20세기에 이미 잊어먹은 Java를 다시 공부할 수 있었는데(그간 Java World는 상전벽해 정도가 아니라 천지 개벽을 몇 번 했던 모양이고) 무식하게 생겨먹은 코볼 스타일 데이터 패킷들을 이리 쪼개고 저리 붙이는 일들이 주 업무였다. 대충 팀 동료들하고 대화가 안되는 것 때문에 무지 타파 차원에서 패턴 책이며 이런 저런 방법론 (XP니 TDD니)이며, 그렇고 그런 프레임워크들 따위를 뒤적거리느라 정작 내공 수련은 별로 못한 것 같다. 그러다 웹 브라우저 만드는 팀이 생긴다는 첩보에 그냥 재미있어 보여서 (라기 보다는 사실 취미로 XUL 코드 만지다 재미 들린 김에 삘 꽂혀서) 무작정 덤빈 후로, 오늘날 까지 쭉- 이어지고 있다. 아무튼 그래서 또 20세기 이후로 잊어먹은 C++ 도 다시 배웠고, (역시나 그 사이에 C++은 천지 개벽, 아니 평행 우주가 몇 개 겹쳐진 양 복잡해졌고), Visual Studio 도 많이 익숙해졌고, 대략 치떨리게 내 수준을 뛰어넘는 WebKit 코드랑도 계속 부르스를 땡기면서 산다.
#4 앞으로 이직을 또 하면 네 번째 회사가 된다. 뭘 하게 될지는 모른다. 가끔 농담으로 "개발자라면 손목 시계부터 메인 프레임까지"(물론, 이 문구는 리눅스 진영의 캐치프레이즈같은 거다) 라며 넉살을 떨 때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손목 시계든 메인 프레임이든 한 우물을 10년 판 사람은 이거 저거 만져만 보고 깊이 파고들지 못한 사람보다 뭔가 더욱 본질에 가까운 능력을 획득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거 저거 되는대로 잡다하게 만져본 사람은 그저 만져보기만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내가 어디 회사 채용 담당자라면 나같은 사람 안뽑는다 (笑) 꿈은 구글이고 현실은 적자난 SI라, 어쨌든 오늘은 오늘을 봉합해야 넘어갈 것이니, 그래서 나는 어디로 갈까. 그래도 한 번 같이 해보자는 데가 없진 않지만, 이 짓도 한 십년 해보니 사람은 자기 있을 곳이 따로 있는 줄 알겠다. 오호라, 그러니 내 자리가 어딘고? 어디 가서 용한 점쟁이나 하나 알아볼까?
#5 뭔가 '차별화' 되지 않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거꾸로 매달아 놓고 훈제 구이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세상이다. 솔직히 코드를 찍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것도 아니고, 알고리즘에 빠삭- 한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되먹은 전공 분야 없는 건 지금껏 고백한 대로고, 그래서 영어를 잘 하나 뭘 잘하나? 뭐, 있으면 있기야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게 다 개발하곤 별로 상관 없는 것들이지 싶다. 까놓고 말해서 대한민국에서 백발 성성한 익스퍼트들이 생길지 어떨지도 (그러리라는 모두의 희망 사항과는 별개로) 의심스러운데, 이 참에 아예 길게 보고 업종을 바꾸든지, 혹은 바꿀 밑천 벌러 공부를 좀 하든지- 하는 것도 사뭇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겠다.
#6 하지만 재미 없는 건 안할테다. 세상에 신기한게 많으면, 맨날 새로운거 튀어 나오고 눈 돌아가게 변해가는 이 바닥일들도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마누라 애새끼 먹여살리러 다만 월급 얼마라도 더 나오고, 모가지 날아갈 걱정 좀 덜 하는 직장에 납작 엎드려있는 게 가장의 미덕은 아닐 게다. 뭘 해도 재미있는 걸 하자. 인생, 더 살아봐야 알겠다. m_yea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