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지향 운동 취지문에 대하여

1. 텍스트 지향 운동의 '텍스트'란,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최소 규준의 표현 수단을 가리킵니다.
2. 텍스트 지향 운동은 텍스트의 과잉이 불러오는 허위 정보 유포 같은 여러가지 문제점을 경계합니다.
3. 텍스트 지향 운동의 의도는 문자만 쓰자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과잉을 막자는 것입니다.
4. 텍스트 지향 운동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책임있는 텍스트 사용을 권장합니다.
5. 텍스트 지향 운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건강한 인터넷 문화를 이루기 위한 지향 수단입니다.
6. 텍스트 지향 운동은 정확한 표현, 정확한 출처 표기를 권장하며, 이것은 인터넷 문서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 지향 운동의 띠를 여러분의 웹사이트 귀퉁이에 두르는 것은 이상을 염두에 두겠다는 자기약속입니다. 텍스트 지향의 정신을 떠올리고 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때는 텍스트를 만드는 표현 수단이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을 것입니다.


위의 글을 두고 아르님 블로그에서 추태를 부렸으니 이제 해명이든 변명이든 속죄든 해야할 처지가 되었다. 이미 험한 말 뱉은 처지에, 뭐 제대로 한 번 망가져 볼 참이다. 하필 리드미님 같은 고수분을 건드렸으니 댓가는 치러야하지 않겠는가.

누구나 '텍스트 지향운동'의 배너를 건 사람, 또 배너를 클릭하는 사람마다 저 취지문을 보게 될 것이며, 그렇기에 취지문은 '텍스트 지향 운동'의 간판이자 본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글이다. 그런 글에, "형편없는 작문" 이라는 악담을 한 것은, 변명하자면 '내 기준에서의' 이야기이고, 내 기준에서 '형편없다' 라고 하는 글은,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좀 더 어렵게 설명할 수 있다. 글 쓰기의 '기술' 이란, 결국 쓰고자 하는 내용을 독자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애석하게도 이 글은 어떤 운동의 취지를 전달하는데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 왜일까? 그것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가 빠졌기 때문이다. 일단 저 취지문을 읽는 독자들, 그리고 저 취지문이 '공감시키고자 하는' 독자들이 누구인가? 라는 문제부터 짚어야할 터인데, 잘 모르니까 일단은 나같은 평범한 인터넷 사용자, 라고 가정해보자.

그런 가정하에서 보면, 글이 어렵고 딱딱하다. 글의 처음에, 일단 '텍스트' 라는 것을 정의하고 있는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터넷상에서 만날 수 있는 '텍스트' 라는 단어는 ASCII, EUC-KR, S-JIS, UCS2 등의 특정 캐릭터셋 인코딩을 따르는 문자열 데이터, 쉽게 말해서 그냥 '글자들' 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뭔가 인문학적인 느낌으로, "의미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최소 규준의 표현 수단" 이라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규준" 이라는 단어를 국어 사전에 의지하지 않고 무슨 뜻인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 인구의 몇 %나 될까? (사실 사전을 봐도, 문맥에 맞춰 뜻을 이해하는 게 그리 쉽진 않다. 국어 사전이란게 대개 그렇긴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객관식 문제들을 찍으며 익힌 잔머리를 살짝 굴리면, '규'는 뭔가 '규칙' 같은 말일듯 하고, '준'은 기준, 표준 뭐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대충 감이 올 것도 같은데, 아무래도 명확하게 뜻이 그려지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라면 한자를 병기하거나, 뜻을 설명해주거나 할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다른 쉬운 단어로 대체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요컨대, 운동이 공감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를 써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 문장에서 '진짜 기술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점' 이라면, '텍스트'라는 단어를 명확히 정의한 상태에서 글을 진행하려고 한 점이다. 인문학 계열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텍스트' 라는 말을 들을 때 뭔가 복잡 다단한 의미나 특정한 개념들을 떠올릴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 특히 아직 그런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면 - '텍스트' 라는 단어를 '글자들' 이라는 뜻으로 풀수만 있어도 다행이기 때문이다. ('교과서' 라는 단어를 떠올릴 경우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는 차라리 1.1 로 업데이트 되기 전의 1.0 버전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이제 2, 3번 문장으로 들어가면 "텍스트의 과잉" 을 막자는 얘기가 나온다. 위에서 '텍스트' 를 '최소 규준의 표현 수단' 이라고 했는데, 텍스트 자체에 '최소' 라는 말이 들어간 상황에서 (여전히 '규준'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과잉' 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되면 독자는 머리가 어지럽다. 뭐 그거야 내가 무식해서 그렇다 치고. 어쨌건 '과잉'은 어떻게 하면 과잉인가? 어떤 기준에서 과잉이라고 말할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는데, 그게 또 참 애매한 문제다. 물론 저 글 어디에도 어떤 상태를 '과잉' 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는 정의하고 있지 않다. 이왕 정의를 하려면 좀 친절하게 해주든가 할 일이지... 독자로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운동이고 뭐고 "어쭈, 잘났어들!" 하고 심술을 내주고 싶어진다. 나도 한 마디 해야지. "텍스트의 오만" 어, 이거 제법 안티먹물스럽고 괜찮지 않나.

이런 상태에서, 다른 문장들은 더 볼 것도 없다. "책임있는 텍스트 사용" 이라는 것도 약간 모호하고, 뜬금없이 출처 표기해서 신뢰도를 높이자는 것도 무슨 상관이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이미 독자는 맘 상했다. 요컨대, 저 글은 기술적으로 나같은 평범한 독자들을 상대하는데는 실패한 글이고, 내 기준으로는 '형편없는' (즉, 한 두 군데 표현상의 실수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빌드 오더를 잘못 짠) 글이다. 뭐, 내용이 쏘옥 눈에 박히는 사람들에게라면 꽤 잘 쓴 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애초에 내 가정이 틀렸다. 저 글은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읽으라고 씌여진 글이 아니며, 저 글의 표현 방법을 충분이 이해할 수 있을만한 사람들을 위해 씌여진 글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 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능히 '텍스트의 과잉' 을 막을 수 있을 사람인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 글의 의미를 잘 이해한 사람들이, 이제 쉽고 편한 말로 뭐하자는 운동인지 각자가 자기의 자리에서 설명해주라는 걸까? 선생님들처럼?

일단 이정도 하자. 어쨌든 간에,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인가? 가짜집시가 성격이 더러워서? 빙고. 정답이다. 하지만 세상에 성격 좋은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잖나. 성격이 좀 더러운 독자들 까지를 감안했을때, 이유는 간단하다. 저 글이 운동의 취지를 '지나치게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지금까지, 나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최소 규준의 표현 수단만을' 사용한 상태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예를 보였다. '최소'를 너무 작게 잡으면 독자에게 의미를 전달할 수 없고, 너무 크게 잡으면 텍스트가 '과잉' 되버리는데, 이 경우엔 전자다. 독자층을 잘 설정하는 '기본적인' 작업을 '운동의 취지'가 덮어버린 것이며, 이것이 내가 말하는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모습이다. 몰이해는 오해를 부르고, 오해는 증오를 부르기 마련이다. 누가 좋은 운동 하면서 좋지 않은 소릴 듣고 싶으랴만, 애석하게도 엉뚱한데서 악담하는 나같은 사람이 생기는 것,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쓸데 없는 글, 쓸데 없는 이미지를 넷에다 막 싸질러놓지 말자는 얘기를 하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취지문은 일반적인 독자들을 감안했을 때 결코 짧게 씌여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또, 저 글이 '운동'으로서의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서라면, 취지를 전달하고 공감시키기 위해, 아주 '기술적인' 글쓰기가 필요하다. 내 생각으로는, '취지문' 자체는 1.0 문서의 내용과 표현을 일부 수정하는 정도로 족하고, 현재의 1.1 문서를 대신하여 운동의 전체적인 목적과 방향, 의도등을 설명하는 보다 길고 자세한 글이 별도로 나와야 할 것 같다. 덧붙여, 운동의 취지와 별개로, '행동 강령' 같은 실질적인 지침 사항들을 짧고 간단히, 그러나 친절하게, 강압적이지 않은 표현으로 제시해주고, 배너를 함께 배포하는 쪽이 훨씬 더 '운동' 이라는 명칭에 부합할 수 있을 것 같다.


@ '형편없는 작문' 이라는 악담을 취소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텍스트 지향 운동" 에 동참한 여러 다른 분들에게 어떤 악감정도 없고, 운동을 시작하고 진행하는 분들의 선의 역시 충분히 믿고 있다. 요즘은 좀 시들해진 느낌이지만, '텍스트 지향 운동' 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더 나은 인터넷 세상을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성장해나가기를 바란다.

by 가짜집시 | 2005/12/06 12:17 | 열린 창으로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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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ypris at 2005/12/06 14:00
1.0 이 보고 싶네요. '텍스트 지향 운동'이란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Commented by 가짜집시 at 2005/12/06 14:02
텍스트 지향 운동 배너는 http://hochan.net/forum/viewforum.php?f=2 로 연결됩니다.

Commented by 리드미 at 2005/12/06 16:59
글 잘 읽었습니다. 취지문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 보완될 수 있고,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또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판하신 부분 잘 이해했습니다. 내용을 더욱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좀 더 고민하겠습니다.
Commented by 가짜집시 at 2005/12/06 17:23
에구. 여기까지 왕림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원래 이렇게까지 공격할만한 내용도 아니고, 또 그래서도 안되는 사안인데 어쩌다보니 그냥 사고 치고 매맞는 방향이 되어버렸습니다. 무례한 내용들이 많습니다만, 아무쪼록 곱게 봐주십사 부탁드릴 따름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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