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5월 03일
병아리, 강아지 그리고 고양이에 관한 기억들
#0 어렸을 적에 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 한마리, 데려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 싸늘한 주검이 된 녀석을 보고,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며칠이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기억이 난다. 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병아리 한 마리를 새로 사오셔서는, 양계장에서 직접 '병아리 사육법' 을 배워다 전수해주셨던 것도. (그 방법이란게 사실 좋은 사료에 적정량의 항생제등을 섞어 먹이는 것 뿐이긴 했지만) 새 병아리는 쑥쑥 자라 아예 '닭이 되어서', 좁은 상자를 뛰쳐나갔는데, 어디 차에 치였는지 동네 고양이에게 낚여갔는지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땐 섭섭하고 허전했을지언정 처음의 병아리처럼 아프진 않았다. 어린 병아리처럼 예쁜 생물이 자라서 처치 곤란한 '닭'이 된다는 걸 왜 어린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1 좀 더 어렸을 때를 추억해보면, 공장에서나 집에서나 늘 개들이 몇 마리는 있었다. 잘 걷지도 못하는 놈이 "곰순아 밥먹자!" 라며 뽈뽈뽈 기어가 '개밥'을 뺏아먹었다 - 그것도 곰순이랑 나란히 개밥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 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지.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들을 볼 수 있었고, 나는 늘 그 새끼 강아지들이 다른 집으로 입양가는 게 늘 서러웠다. 그들을 다 키울 수는 없는 일이라는 건 어린 나조차도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긴 했다.
#2 우리집에서 키우는 셰퍼트 암컷의 이름은 "개밥 사건" 덕분에 늘 '곰순이' 였다. 중학생때 기르던 마지막 곰순이는 새끼때 연탄 가스에 중독되는 사건이 있었다. 덕분에 멍청한데다, 발정도 하지 않는 이상한 개로 자랐는데, 녀석의 눈은 늘 뭔가 서글픈 눈이었다.처분을 하려고 해도 새끼는 한 번 보고 처분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으로 곰순이는 여러해를 우리와 함께 살았다. 결국 곰순이와 헤어지던 날, 곰순이에게 나는 뭐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더라, 아니 인사를 하긴 했던가.
#3 토끼. 뭔가 대단히 교육적인 목적에서 기르기 시작한 것 같은데, 아버지와 집 뒷산으로 토끼 줄 풀뜯으러 다녔던 기억만 난다. 나랑 동생이 가면 늘, 채취량이 형편 없었다. 아버지가 동행하면 몸은 힘들었지만 커다란 마대자루로 가-득 뜯어다 놓고 한동안 먹이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잿빛 수컷과 흰색 암컷 한 쌍을 우리에 넣고 키웠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성질이 고약했다. 그러니까 놈들은 '애완동물' 이라기 보다는 '가축' 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 가축 한 쌍은 가족들의 보신을 위해 몸바쳐 희생했는데, 배를 가르고 보니 암놈이 임신중이었던지라 다들 혀를 찼다. (오오메, 아깐그~) 어쨌든 연탄불에 구워 먹었던 몇몇 부위는 참 맛있긴 했는데... 체면상 그거 몇 점 먹은 것 외엔 다른 음식엔 손을 대지 않았다. 체면상.
#4 생각해보면 집에서 키우던 개들은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개소주나 보신탕이 되는 운명이었다. 나는 단 한번도, 내가 키우던 개를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개들을 '고기덩어리' 로 밖에 보지 않았느냐면 그건 아니다. 개를 먹는다는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내게 시비를 걸고 싶은 사람은 이 시점에서 꺼져주시기 바란다. 그것들은 '애완동물' 이라기 보다는 '가축' 이었고, '가족' 이라기 보다는 '노비' 였을 뿐이다.
#5 열살때쯤, 집에 고양이를 키웠다. 처음 키운 고양이는 어디선가 얻어온 암놈이었는데, 채 자라기도 전에 가출을 해버렸다. 고양이가 집을 나가지 않게 하려면 꼬리를 자르거나 해서 불구로 만들면 된다는 얘길 많이 들었지만 나는 우리집 고양이들에게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으로 얻어온 숫놈은 ('예삐'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래 오래 내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꽤 거구의 노란 태비였다. 꼬리를 자르지도, 묶어두지도 않았지만 놈은 다 자라고도 오랫동안 집에 머물러있었다. 녀석의 특기는 '밥상 밑에서 대기하기" - 잘 버티면 살점이 좀 남아있는 생선 찌꺼기 등을 얻어먹기도 했으므로 - 와 "자는데 문 열고 들어와서 이불에 파고 들기 (대신 문 안닫고 사람 감기 걸리게 하기)" 였다. 내가 녀석을 좋아했던 만큼 녀석도 날 좋아했으면 좋을 텐데. 화상으로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했다가 집에 들어와서 내가 가장 먼저 부른 건 예삐 였다. 녀석은 그러나 내가 부르기도 내 기척을 알아채고 어슬렁거리며 마루로 기어나와 나를 맞이해주었다.
#6 예삐가 지붕 위에서 놀다가 어느 작은 암코양이와 눈이 맞은 게 언제였더라? 결국 예삐는 영역을 넓혀선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예삐를 뺏아간(?) 암코양이가 우리집을 점령했다. 이름도 붙여주지 못한 그 암코양이는 밥상 밑에 들어오지도, 이불 속으로 파고 들지도 않았지만, 창고에서 새끼 고양이를 네 마리나 낳았다. 아주 우연히 이 새끼들을 발견했는데, 날도 춥고 해서 새끼들 죽을까봐 이것 저것 보온에 신경을 써줬다. 사람한테 새끼들을 들켰으니 물어 옮기거나 할 법도 했지만, 갈데도 마땅치 않았던지 새끼들과 어미 고양이는 창고를 떠나지 않았다. 네 마리 중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한 마리 뿐이었고, 나머지 세 마리는 차례로 차갑게 식어갔다. 어미 고양이는 시체를 내다 버릴 생각도 하지 않아 주검 처리는 우리 가족의 몫이었다. 예삐를 꼭 빼닮은 마지막 한마리는, 집 마루 밑에서 쥐를 쫓아다니며 사냥 연습을 하다가, 결국 독립해서 어디론가 떠났다. 새끼를 독립시킨 어미냥이도 머지 않아 집을 떠났다. 나는 그 후로 10년을 넘게 고양이를 기르지 못했다. 기와 지붕 위에서 햇볕을 쬐며 꾸벅꾸벅 졸던 고양이의 기억만 남은 채로.
#1 좀 더 어렸을 때를 추억해보면, 공장에서나 집에서나 늘 개들이 몇 마리는 있었다. 잘 걷지도 못하는 놈이 "곰순아 밥먹자!" 라며 뽈뽈뽈 기어가 '개밥'을 뺏아먹었다 - 그것도 곰순이랑 나란히 개밥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 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지. 몇 년에 한 번 정도는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들을 볼 수 있었고, 나는 늘 그 새끼 강아지들이 다른 집으로 입양가는 게 늘 서러웠다. 그들을 다 키울 수는 없는 일이라는 건 어린 나조차도 수긍할 수 밖에 없는 일이긴 했다.
#2 우리집에서 키우는 셰퍼트 암컷의 이름은 "개밥 사건" 덕분에 늘 '곰순이' 였다. 중학생때 기르던 마지막 곰순이는 새끼때 연탄 가스에 중독되는 사건이 있었다. 덕분에 멍청한데다, 발정도 하지 않는 이상한 개로 자랐는데, 녀석의 눈은 늘 뭔가 서글픈 눈이었다.처분을 하려고 해도 새끼는 한 번 보고 처분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으로 곰순이는 여러해를 우리와 함께 살았다. 결국 곰순이와 헤어지던 날, 곰순이에게 나는 뭐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더라, 아니 인사를 하긴 했던가.
#3 토끼. 뭔가 대단히 교육적인 목적에서 기르기 시작한 것 같은데, 아버지와 집 뒷산으로 토끼 줄 풀뜯으러 다녔던 기억만 난다. 나랑 동생이 가면 늘, 채취량이 형편 없었다. 아버지가 동행하면 몸은 힘들었지만 커다란 마대자루로 가-득 뜯어다 놓고 한동안 먹이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잿빛 수컷과 흰색 암컷 한 쌍을 우리에 넣고 키웠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성질이 고약했다. 그러니까 놈들은 '애완동물' 이라기 보다는 '가축' 이었던 셈이다. 결국 이 가축 한 쌍은 가족들의 보신을 위해 몸바쳐 희생했는데, 배를 가르고 보니 암놈이 임신중이었던지라 다들 혀를 찼다. (오오메, 아깐그~) 어쨌든 연탄불에 구워 먹었던 몇몇 부위는 참 맛있긴 했는데... 체면상 그거 몇 점 먹은 것 외엔 다른 음식엔 손을 대지 않았다. 체면상.
#4 생각해보면 집에서 키우던 개들은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나거나, 개소주나 보신탕이 되는 운명이었다. 나는 단 한번도, 내가 키우던 개를 먹는다는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개들을 '고기덩어리' 로 밖에 보지 않았느냐면 그건 아니다. 개를 먹는다는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내게 시비를 걸고 싶은 사람은 이 시점에서 꺼져주시기 바란다. 그것들은 '애완동물' 이라기 보다는 '가축' 이었고, '가족' 이라기 보다는 '노비' 였을 뿐이다.
#5 열살때쯤, 집에 고양이를 키웠다. 처음 키운 고양이는 어디선가 얻어온 암놈이었는데, 채 자라기도 전에 가출을 해버렸다. 고양이가 집을 나가지 않게 하려면 꼬리를 자르거나 해서 불구로 만들면 된다는 얘길 많이 들었지만 나는 우리집 고양이들에게 그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음으로 얻어온 숫놈은 ('예삐'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오래 오래 내 사랑을 독차지했는데, 꽤 거구의 노란 태비였다. 꼬리를 자르지도, 묶어두지도 않았지만 놈은 다 자라고도 오랫동안 집에 머물러있었다. 녀석의 특기는 '밥상 밑에서 대기하기" - 잘 버티면 살점이 좀 남아있는 생선 찌꺼기 등을 얻어먹기도 했으므로 - 와 "자는데 문 열고 들어와서 이불에 파고 들기 (대신 문 안닫고 사람 감기 걸리게 하기)" 였다. 내가 녀석을 좋아했던 만큼 녀석도 날 좋아했으면 좋을 텐데. 화상으로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했다가 집에 들어와서 내가 가장 먼저 부른 건 예삐 였다. 녀석은 그러나 내가 부르기도 내 기척을 알아채고 어슬렁거리며 마루로 기어나와 나를 맞이해주었다.
#6 예삐가 지붕 위에서 놀다가 어느 작은 암코양이와 눈이 맞은 게 언제였더라? 결국 예삐는 영역을 넓혀선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대신 예삐를 뺏아간(?) 암코양이가 우리집을 점령했다. 이름도 붙여주지 못한 그 암코양이는 밥상 밑에 들어오지도, 이불 속으로 파고 들지도 않았지만, 창고에서 새끼 고양이를 네 마리나 낳았다. 아주 우연히 이 새끼들을 발견했는데, 날도 춥고 해서 새끼들 죽을까봐 이것 저것 보온에 신경을 써줬다. 사람한테 새끼들을 들켰으니 물어 옮기거나 할 법도 했지만, 갈데도 마땅치 않았던지 새끼들과 어미 고양이는 창고를 떠나지 않았다. 네 마리 중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한 마리 뿐이었고, 나머지 세 마리는 차례로 차갑게 식어갔다. 어미 고양이는 시체를 내다 버릴 생각도 하지 않아 주검 처리는 우리 가족의 몫이었다. 예삐를 꼭 빼닮은 마지막 한마리는, 집 마루 밑에서 쥐를 쫓아다니며 사냥 연습을 하다가, 결국 독립해서 어디론가 떠났다. 새끼를 독립시킨 어미냥이도 머지 않아 집을 떠났다. 나는 그 후로 10년을 넘게 고양이를 기르지 못했다. 기와 지붕 위에서 햇볕을 쬐며 꾸벅꾸벅 졸던 고양이의 기억만 남은 채로.
# by | 2007/05/03 14:00 | 시시껄렁한 독백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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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은 더러 길렀지만 직접 묻어준 녀석은 한 마리도 없었고(다른 가족들이 해서), 중학교 때 개구리 해부 후 동물 묻어주기는 처음인데 잘 몰라서 죽였다는 게 너무 미안하고 마음 아프더군요.
새로이 받아온 녀석들은 온도 조절을 엄청 신경 쓰고 있는데 잘 자라줄런지... 제발 그랬으면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