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선거, 그리고

#0 재수없게 비가 내린다. 투표율은 역대 최저를 가볍게 비웃으며 50% 미만으로 내려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누구도 밝게 웃으며 내일을 이야기할 수 없는 날, 무심하게 비가 내린다. 우리 팀장은 오후 늦게서야 회사에 나온 나에게, "찍을 놈이 없어서 이번 투표는 포기 했습니다" 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나는 차마 그에게 독설을 뱉을 수 없어서 (그는 나보다 나이가 열 살 이상 많다) 뜬금 없는 이야기나 늘어놓을 뿐이다. 요새, "나는 찍지 않았'읍'니다" 티셔츠가 잘 팔린다는데 그거나 한 장 사서 입고다닐까봐요.

#1 문제는 젊은층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 것, 이라고 쉽게 말하는 노친네들을 죄 쏴죽여버리면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된다. 진담이다. 누구도 그들과 함께 절망해줄 수 없다. 그들의 절망을 말해줄 사람들은 오래 전에 굶어 죽었거나 입을 닫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오늘도 어제처럼 모니터 속에 몸을 묻는다. 우리에겐 통곡이 필요하다. 누가 저 헐벗고 귀 뾰족한 전사들을 탱킹해서 여의도를 침공하고, 청와대 지붕 위에 빨간 점을 찍게 할 것인가. 누가 입을 열어 고백할 것인가. "여기가 바로 강간의 왕국이야." 라고.

#2 어제 점심 때였나, 웬 어린 처자들이 투표좀 하라고 선전하는 광고를 보다가, "근데 쟤네들 선거권은 있는 거야?" 라고 동료들에게 물었다. 누구 누구는 있고 누구 누구는 없다고 했다. "아, 쟤들이 원더걸스구나." 사람들이 웃었다. 나는 "난 그래도 우리 동네 국회 의원 후보가 누군지는 알아." 라고 잘난척을 했지만, "그런건 몰라도 되지만 쟤들 모르는 건 죄악이야" 라는 대답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3 그리고, 혹은 그래서, 부끄럽구나.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않는 내가, 틀린 것을 틀리다고 말할 수 없는 내가, 삶에 치열하지 못한 내가, 어느때보다도 우울한 나라에서 어느때보다도 행복한, 내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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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짜집시 | 2008/04/09 17:46 | 시시껄렁한 독백 | 트랙백(1)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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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From Now On,.. at 2008/04/09 22:04

제목 : 나 너랑 말하고 싶지 않아, 이제.
SealTale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g (프로-그램, 이라고 읽음) 사무실에는 보통 일주일에 한번. 수업이 없는 수요일이나 토요일에 출근한다. 두달간 고용인의 신분으로 참여했지만, 어느새 사람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내 손을 필요로 하는 일이 많아 정신없이 빡빡한 이 스케쥴을 한달간 계속해 오고 있다.이번주 목요일, 즉 내일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1차 시연회가 있을 예정. 목요일 나는 확률변수론 1차 시험이 있는 터라, 수요일을 비우고, 자......more

Commented by at 2008/04/09 19:26
정말 우울한 비네요.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그냥.. 가슴이 아픕니다.
Commented by 민상k at 2008/04/09 22:07
이 글 읽다가 괜히 울컥해서 저도 글을 하나 쓰게 되었네요.
처음으로 트랙백이란걸 한번 걸어봅니다.

#3 을 다시 한번 소리내어 읽으며-
Commented by D\'Arcy at 2008/04/10 01:45
진보신당 0석 안타깝습니다.
시험공부 시간 쪼개서 부재자투표 하고 괜시리 기분 좋았었는데(주변이 다들 투표권 자진포기하는 인간들...태생적 피착취자 근성, 이라고 쏘아붙여주니 웃더군요) 바로 일주일만에 이리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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